코로나 틈타 '제 살길만 찾는 재계'
경총, 정리해고 완화 등 건의… 전경련도 근로시간 연장 등 요구
공항에 납품하는 케이터링 업체에서 일하는 ㄱ씨는 최근 민주노총 상담센터에 해고를 걱정하며 노조 가입이 가능한지를 물어왔다. ㄱ씨는 “회사가 어려워 지난 2월부터 무급휴직을 하게 하고 권고사직을 하더니 200여 명의 직원 중 거의 절반을 내보냈다. 3월 23일에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또 내보냈다”며 “이제 남은 사람들한테도 권고사직이 날아올 것 같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ㄴ씨는 같은 상담센터에 “매출이 급감해 3월 9일~4월 8일 한 달간 무급휴가를 보내면서 동의서를 받았다. 무급휴가 기간 중 회사 측의 사직 강권으로 3월 31일자로 제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연차 소진 강요로 시작된 노동자의 피해가 무급휴직 및 휴업을 거쳐 권고사직과 해고로 이어지고 있다. 업종은 항공, 관광산업에서 전 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노동계가 고용유지를 위한 정부의 대응책을 촉구하는 와중에 경영계는 오히려 해고요건 완화를 주장하고 나서 노사 대립의 골이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4월 1일 ‘노동자 피해 상담 사례 발표’ 기자회견에서 “경총이 코로나 상황을 틈타 되레 해고요건 완화를 주장하는 등 노동자를 고용절벽으로 내몰고 있다”며 “재난기간 해고금지 없는 기업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법인세·상속세 인하 등 ‘숙원’ 해결 나서
경총은 지난 3월 23일 법인세·상속세 인하, 정리해고 요건 완화 등 8대 분야 40개 입법 개선 과제를 담은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국회에 제출했다. 전경련 역시 3월 25일 ‘코로나19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계 긴급제언’을 통해 54가지 과제를 정부에 제안했다. 대형마트 휴일 영업 허용, 탄력적 근로시간제도 최대 단위기간 연장(3개월→1년), 주 52시간 근로 예외 확대,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 완화 등은 두 단체가 동일하게 요구했다.
노동·시민사회 단체는 재벌 대기업들이 코로나를 틈타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법인세는 영업이익이 있는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법인세 인하는 일부 재벌 대기업에만 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경총은 법인세로 기업 부담이 가중되고 있어 최고세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22%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조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선임간사는 “법인세율이 높다고 하는데 실효세율을 보면 2017년 기준 OECD 평균 21.8%보다 낮은 18.0%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코로나 사태로 영세자영업자·취약계층 지원, 사회안전망 강화 등 지원이 필요한 곳이 많은 상황에서 법인세를 인하하면 세수 감소로 국민 부담이 커지고, 자산 불평등과 부의 대물림 문제가 큰 상황에서 상속세 인하 요구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시민사회 단체가 가장 크게 문제 삼은 것은 해고요건 완화를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였다. 경총은 경영상 해고요건을 현행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에서 경영상 판단에 따른 인원 조정 등 ‘경영합리화 조치가 필요한 경우’로 완화하고, 경영상황에 따라 회사가 근로조건의 불리한 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취업규칙 변경의 불가피성이 인정될 경우 집단적 동의 절차 대신 ‘협의’로 변경이 가능토록 완화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현행 32개 허용 업무만을 파견대상 업무로 규정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금지업무만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변경하고, 제조업 등에 파견을 허용해달라고도 했다.
이조은 선임간사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도 단위기간 연장이나 주 52시간 예외 확대는 장시간 노동을 허용하자는 것”이라면서 “지난 3월 6일 사회적 합의 당시 해고와 구조조정을 피하고 가족돌봄휴가 등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자신들의 선언을 구체적으로 이행할 방안을 마련하기는커녕 기존 숙원 사업을 해결하려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총 관계자는 “코로나19를 틈탔다는 것은 오해”라며 “21대 국회에서 입법을 고려해달라는, 굳이 이름을 붙이면 ‘총선 공약용’이었다”고 말했다.
권혁민 전경련 산업전략팀장은 “대형마트 의무휴업을 한시적(1~3년)으로 폐지하자고 한 것은 대형마트가 의무휴업을 해도 사람들이 전통시장에 가지 않았다는 자체 조사 결과와 함께 의무휴업일이 없는 경우 방문할 수 있는 시간대 선택의 폭을 넓혀 코로나 방역을 위한 물리적 거리 두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권 팀장은 “의무휴업일에 대형마트에 있는 물건을 온라인으로라도 팔 수 있게 하는 것도 국민 편익이나 방역 차원에서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평법’ 등 환경·안전 규제 무력화 시도
재계 요구를 뜯어보면 고려할 만한 내용이 없진 않지만, 그간 시민사회가 힘들게 이뤄낸 개혁 조치들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가습기 살균제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해 개정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이 규탄의 대상이 됐다. 재계는 화학물질 규제로 비용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화평법상 신규화학물질 등록기준을 완화하고, 화학물질 등록기간을 1년씩 유예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는 4월 2일 발표한 성명에서 “코로나19 국가 재난과 경제위기 상황을 핑계 삼아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교훈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제·개정한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들을 흔들고 있다”면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째를 맞은 지금까지 어떤 경제단체도 가해 기업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사태 해결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바 없다”고 비판했다.
보건의료 단체는 전경련의 ‘기등재 약제 재평가’ 유예 요구를 비판했다. 기등재 약제 재평가는 기존에 등재된 의약품을 재평가해 효과가 불분명하거나 불필요한 경우 보험급여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말한다. 필수적인 치료제의 보장성을 확대하고 건강보험 급여의 재정 건전성을 위해 지난해 발표한 ‘제1차 건강보험종합계획 2020년 시행계획’에 포함됐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는 지난해 공익감사청구를 통해 건강기능식품에 가까운 콜린알포세레이트라는 약제에 한해 2700억원이 넘는 건강보험 재정이 지출되고 있음을 폭로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정책기획팀장은 “미국에선 건강기능식품에 불과한 콜린알포세레이트가 국내에선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허가받아 2018년에만 건강보험 성분별 청구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면서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위해 불필요한 의약품 소비를 줄이고, 환자들의 보호를 위해 마련한 약제 재평가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 부담을 통해 업계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정부가 내놓는 각종 기업지원 정책이 해고금지·고용유지를 조건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영계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경총 관계자는 “대한항공의 무급휴직 돌입도 최대한 해고를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서 “기업이 최대한 버티는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 ‘6개월 해고금지’ 등 가이드를 주는 식으로 강제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밝혔다.